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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브스토리 (장수진 시집)

by 복부인이꿈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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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브스토리

 

그러나 러브스토리 차례

목숨

가수의 공연이 있는 밤의 식당

해변의 간이 시설

작은 걸리버로부터

대머리 여인

성장

놀이 없는 놀이터

왕의 배려

작은 인간

밤은 옛날의 공장

숲의 뒷모습

친애하는 죽음에게

볕의 자율성

단편 영화

거실과 로켓

띄엄띄엄 말하기

존엄

택시

서서히 개가 되는 날들

나의 발레는 총 검 쇠

전구의 의미

가위 바위 보

그러나 러브스토리

쇳조각

 

에세이 : 어떤 코트

 

그러나 러브스토리 본문중에서

당신이 원한다면

거리의 소음이 되어줄게요

당신이 울 수 있도록

당신의 귀가

당신의 울음을 듣지 못하게

내가 더 크게 울게요

당신이 원한다면 

- 가수의 공연이 있는 밤의 식당 중에서

 

한 여자가 긴 우산을 끌며

걸어왔다.

느닷없이 주르륵 눈물을 쏟았다.

나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곳에 물을 흘리지 마세요.

여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자를 알아보았다.

날카롭게 말하지 말걸.....

여자가 말했다.

당신을 반대하지 않아요.

- 작은 걸리버로부터 중에서

 

불타는 의자에 앉아 거실 창밖을 바라보면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달동네가 보인다. 가난한 마을은 한 줌 빛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밤새 무얼 할까. 등은 꺼지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 자들에게 목가풍의 무드를 제공한다.

- 작은 인간 중에서

 

잠에 빠지면, 시간 공장의 불이 켜진다.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꿈은 흐로고, 봉급도 있다지. 매일 아침을 모으면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다 모으면 죽음이 된다지. 성실한 시간 공장의 근로자는 잠을 자면서 죽게 된다지. 공장장의 전언이다. 영원한 잠이 가장 명예로운 퇴직일 것이다.

- 밤은 옛날의 공장 중에서

 

너는 두 사람이다

죽은 시인이고

시인을 죽인 킬러다

너는 스물일곱이고

아니고 말도 안 되게 노래를 잘 불렀고

 

이제 나만 늙는다

나만 시를 쓰고 마음이나 헛소리가 내게만 존재한다

 

죽음에 빌붙은 들개처럼

텅 빈 헛간을 서성인다

- 서서히 개가 되는 날들 중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소년의 종말을 뜻한다. 소년은 자신의 일을 그만둘 어떤 당위를 찾지 못했음에도, 소년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한다. 소년은 물가로 나간다. 개울에 발목을 담근 소년은 발가락 사이를 노니는 버들치에게 온 정신을 빼앗긴다. 떠날 채비를 하는 소년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을 깨닫는다. 소년은 소년을 버린다. 소년에겐 무기가 없다.

 

불현듯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곁을 떠나가는 친구들에게 나는 '어른의 태도'를 선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느 날 검은 코트를 입고 나선 자리에서 역시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과 마주친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커튼이 드리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커튼이 없다면 누군가는 미치고 말 거야. 기쁨과 슬픔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진실을 피부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 그것이 검은 코트의 사회였다.

- 어떤 코트 중에서

 

작가 장수진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2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했다.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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